그랬던 친구가 자신의 진가를 발휘했던 적이 있었다. 자살하고 싶다는 가상의 친구에게 상담을 해주는 편지를 써보는 글쓰기 시간이었다. 상담이란 상대방의 힘든 상황을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면서 해결방법을 같이 찾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잘못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그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공감을 해주는 것이 우선이다. 여기서 남녀차별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아이들의 글쓰기를 보니 성별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공감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지만( 물론 'T' 성향이 강한 여자아이들은 제외) 남자아이들은 가상의 친구가 잘못한 점에 대해 지적하기 바빴다.
“너네가 쓴 편지를 그 친구가 받으면 울면서 바로 다리 위로 갈지도 모르겠어. 위로를 해 줘야지.”
“하지만 잘못한 점이 많은데 어떻게 위로를 해줘요? 잘못한 건 잘못했다고 말을 해줘야죠.”
“잘못한 건 그 애도 알 거야. 그래서 괴로운 거잖니.”
"그래도 확실히 말을 해줘야죠. 위로의 말이 나오질 않아요."
그 친구와의 수업이 그 주의 ‘상담하는 글쓰기’ 마지막 시간이었다. 평소와 다르게 주저함 없이 글을 써내려 갔다. 띄어쓰기 틀리는 것만 중간중간 고쳐줄 뿐 내용에 대해선 흠잡을 곳이 없었다. 마치 진짜 상담사처럼 가상의 친구 마음을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는 글이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네가 자살하고 싶다 했는지, 그건 아마 네가 가족들한테 받을 비난 때문이라 생각해.
(중략)
아, 그리고 엄마, 형한텐 사실대로 말해. 술이랑 담배를 했다는 건 말하지 말고. 그리고 술이랑 담배는 몸에 나쁜 영향을 끼치니까 앞으로는 하지 마. 이번에는 그 친구를 위로해 주려고 그런 거니까 이해해 줄게. 자살은 소중한 추억을 쌓을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인 거야. 그러니까 다신 그런 생각하지 마. 언제든 힘든 일 있을 때는 나한테 연락해. ’
수업이 끝나고 나는 그 친구에게 말했다.
“넌 정말 그 친구를 잘 이해해 주더라. 이렇게 공감을 잘해주는 친구는 네가 유일해 보여. 너 공감능력이 정말 뛰어난 아이 같아. 너도 관심 있다면 나중에 상담 쪽의 일을 하면 정말 잘 할거 같아.”
“선생님, 그럼 변호사 같은 것도...”
“그러엄~! 변호사도 변호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서 그 사람의 마음과 말을 대변해 주는 일이잖아. 굉장히 잘할 것 같아.”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어머님, 논술학원입니다. 방금 수업이 끝났는데요. 00 이가 글을 너무 잘 썼다고 칭찬하고 싶어서 전화드렸어요. 오늘 상담하는 글 쓰기를 했는데, 상대를 공감해 주는 편지를 너무 잘 썼어요. 다른 남자친구들은 잘못한 점만 부각하는 글만 썼는데 00은 실제로도 정말 잘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편지를 썼더라고요. 너무 잘 썼어요. 글을 읽는 제가 용기를 얻어가는 기분이었어요.”
“어머... 우리 애가 잘하는 게 있다니, 저 이런 피드백 너무 좋아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학원은 공교육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을 보충하기 위해 오는 곳이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아이들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학부모님들의 땀과 걱정이 담긴 수업료에 대해 나는 최대한 재밌게 글쓰기를 알려줄 의무가 있다. 하지만 억지로 학원에 끌려와서 불만스럽게 않아있는 아이, 열심히 알려주려고 하지만 좀처럼 글쓰기가 제자리인 아이, 들인 노력에 비해 모자라 보이는 시급 등 현타는 수시로 찾아온다. 그렇게 멘붕의 상태가 이어지는 하루하루 속에 아주 가끔, 아이의 장점을 발견하고 칭찬해 줄 수 있는 이런 시간이 있어 아직까지 이 일을 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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