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0

완벽주의자 (2)

“안녕하세요, 원장님.”“어머, 안녕하세요, 00 어머님~”“우리 00가 집에 와서 저번 한국사 논술 시간에 새로운 선생님이 와서 수업을 했는데 너무 재밌었대요. 학원이 재밌다고 한 경우가 처음이거든요. 어떤 선생님이세요?”“우리 아들도 선생님 되게 재밌다고 그러던데, 어느 분이세요?”“어머, 그래요? 너무 다행이에요. 선생님 너무 좋은 분이세요. 모음 선생님~ 이리 와보세요. 여기 학부모님이 선생님 한번 보고 싶으시대요.” ‘아.. 나 진짜 아이들 가르치는 것이 천직일 지도 몰라. 뒤늦게라도 나의 재능을 찾아서 참 다행이야.’ 하지만 이런 자뻑의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수업을 하면서 제시간에 수업을 못 끝내기 일쑤였고, 일단 나는 아이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제로였다. 지금도 카리스마 부분에 대해선..

콜리는 용감했고 나는 비겁했다.

천 개의 파랑SF가 진보하는 기술 속에서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예견하는 장르라면, 『천 개의 파랑』은 진보하는 기술 속에서 희미해지는 존재들을 올곧게 응시하는 소설이다. 발달한 기술이 배제하고 지나쳐버리는 이들, 엉망진창인 자본 시스템에서 소외된 이들, 부서지고 상처 입은 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있던 이들을 천선란은 다정함과 우아함으로 엮은 문장의 그물로 가볍게 건져 올린다. 그의 소설은 희미해진 이들에게 선명한 색을 덧입히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락사당할저자천선란출판허블출판일2020.08.19 나의 마음 한 구석엔 아직 순수함이 남아있는가.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아니오. 기술의 발전이 인간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고 무엇을 가져다주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연재는 대답하지 못했다...

완벽주의자 (1)

부원장은 학원에서 없어선 안될 존재이다. 학원의 거의 모든 일을 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수업을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학생관리, 시간표관리, 상담, 학습지 만들기, 광고 전단지 만들기, 선생님들 교사용 지도서 챙기기, 배달 업체에 점심 예약하기 등 큰 일부터 사소한 일까지 부원장이 없으면 학원이 그대로 멈출 지경이다. 이 많은 일을 하면서도 큰 실수도 하질 않는다. 아이들을 다루는 실력도 수준급이다. 부원장은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가 있다. 아이들도 첫 만남부터 그걸 느끼다 보니 웬만한 개구쟁이가 아니면 부원장의 말을 잘 듣는다. 아이들 앞에서 원맨쇼를 많이 하다 보니 ‘개그맨’ 소리를 듣는 나와는 사뭇 다른 재질의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갓생을 사는 사람을 보면 존경스러우면서도 신기하다..

이제, 소년이 왔다.

소년이 온다2014년 만해문학상, 2017년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수상하고 전세계 20여개국에 번역 출간되며 세계를 사로잡은 우리 시대의 소설 『소년이 온다』. 이 작품은 『채식주의자』로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에게 “눈을 뗄 수 없는, 보편적이며 깊은 울림”(뉴욕타임즈), “역사와 인간의 본질을 다룬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소설”(가디언), “한강을 뛰어넘은 한강의 소설”(문학평론가 신형철)이라는 찬사를 선사한 작품으로, 그간 많은 독자들저자한강출판창비출판일2014.05.19  그녀가 옳았다. 그녀가 구하고자 했던 현재가 구원받았다. 처절하고 비참하고 아팠던 과거가, 왜 그런 일이 여기서 일어났는지 원망스러웠던 과거가 지금의 우리를 구했다. 우리를 살렸다. 그 끔찍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

이 수업을 좋아한다고요? (2)

아이의 엄마가 처음 학원에 방문했을 때 고민을 가득 가지고 상담을 했었다고 한다. 한글을 완전히 깨치기 전에 영어유치원을 다녔고, 덕분에 영어는 굉장히 잘했지만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는데도 한글실력이 현저히 뒤처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말도 어눌하고 제대로 된 한글 쓰기가 안되었다. 엄마는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았고 다니던 영어 관련 학습을 모두 끊어버리고 국어에만 집중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런 사연을 안고 나에게 온 아이였다.  이 아이의 전적을 듣고 나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2학년 2학기 초였지만 아이는 ‘예쁘다’ ‘귀엽다’ ‘사과’ 같은 단어의 맞춤법도 매번 틀렸다. 그리고 말할 수 있는 최대의 표현이 ‘기쁘다, 좋다, 싫다’ 같은 1차원적인 것이었다. 모국어를 좀 더 배웠어야 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