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한강
- 출판
- 창비
- 출판일
- 2014.05.19
그녀가 옳았다. 그녀가 구하고자 했던 현재가 구원받았다. 처절하고 비참하고 아팠던 과거가, 왜 그런 일이 여기서 일어났는지 원망스러웠던 과거가 지금의 우리를 구했다. 우리를 살렸다. 그 끔찍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한강 작가는 목메는 이 글을 쓸 수 없었을 테고, 이 작품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대한민국 최초의 노벨 문학상은 이 세계에선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사건이 과거를 보여주는 문학작품에 사람들의 관심을 쏠리게 했고 일어나선 안 되는 행태를 가만 두고 보지 않게 했다. 참으로 우연이고 필연이다.
친구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걸 보고도 동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숨어있었다. 그 시체마저도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친구를 그냥 두고 왔다는 죄책감, 나만 살아서 도망쳤다는 부끄러움, 정대를 향한 그리움과 미안함, 저 대가 그렇게 되도록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 그 어둡고 무거운 감정이 동호를 끝까지 집에 갈 수 없게 마뎠다. 독재니, 정치니 하는 것들을 동호는 몰랐을 거다. 그냥 친구를 잃었다는 슬픔과 내가 함께 있어주지 못했다는 후회가 총을 들게 했다. 동호는 무서웠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 총이라는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것들이다. 동호는 친구를 혼자 둔 자신을, 친구를 그렇게 만든 그들을 용서하지 못한다. 분노와 죄책감이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넘어섰다. 하지만, 분노했지만, 맞서 싸우리라 결심했지만 인간이 인간을 죽인다는 건 차마 할 수 없었다. 내가 쏘지 않으면 죽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차마 못했던 것이다. 나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는 본능보다도 인간성을 지켜야 한다는 도리, 인간에 대한 존엄이 더 앞섰다. 결국 그의 반짝이던 인생은 찰나로 끝났다.
지나간 여름이 삶이었다면, 피고름과 땀으로 얼룩진 몸뚱이가 삶이었다면, 아무리 신음해도 흐르지 않던 일초들이,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이 삶이었다면, 죽음은 그 모든 걸 한 번에 지우는 깨끗한 붓질 같은 것이리라고.
그 고통의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은 사는 게 죽음보다도 더 끔찍했을 것이다. 고문과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며 그들은 살아있음이 치욕이고 고통이었다. 비겁한 나를 대신해서 모진 세월을 견뎌온 그들에게 가늠할 수도 없이 깊고 무거운 빚을 졌다.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갚을 수도 없는 빚이 있는데, 그들 덕분에 현재의 우리가 온전히 살 수 있게 되었다. 태어날 수 있도록 해준 빚, 살아갈 수 있게 해 준 빚, 인생 전부를 저당 잡힌 셈이다. 하지만 그냥 살아가라고 말한다. 오히려 살아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내어준다. 그들은 손해만 보았고 우리는 득만 보았다. 미안하다. 죄송하다. 그리고 감사하다. 과거가 현재를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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